몰아쓰는 영화일기 영화/연극/드라마

1. 문라이트

'물'의 메타포가 마음에 들었던 영화. 

물은 푸르고, 차가우며, 고요하다. 그 속에 머무르는 사람이 어떤 행동을 취하는가에 따라 공포스런 존재가 되기도 하며 때로는 아주 쉬이 다룰 수 있는 존재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결국은 자신에게 달려있다. 리틀은 어릴 적 후안으로부터 물에 저항하는 법을 배웠으나, 계속해서 연습하지 않은 채 흘러가는 물을 방관하는 삶을 살아간다. 그래서 결국 자기 삶의 키를 쥐지 못한 채 휘둘리며 푸르스름하고 고요한 인생을 품어버리게 된 것이다. 영화 중간 주인공이 리틀과 블랙이 아닌 '샤이론'이라는 이름의 시간을 살 수 있도록 도와준 것도 물이었다. 그의 피칠된 얼굴을 닦아주었으며, 동시에 안일했던 일상을 살아가던 그의 정신을 번쩍 들게 만들 수 있었던 존재. 그 순간 샤이론을 잡아간 경찰이라는 존재에 의해 순간적인 힘은 끝내 굴복되는데, 이는 결국 개인의 의지만으로 자아를 완벽하게 실현하며 살아갈 수 없는 어떤 사회적인 체제가 아닐까 싶었다. 다시 블랙으로 불리우는 삶을 살아가며 자신의 정체성을 잃은 샤이론은 케빈과의 재회를 통해 다소 비극적인 물의 인생을 실감한다. '불'을 쓰는 요리사라는 '직업'을 가지며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는 케빈과는 무척이나 상반된 (대놓고 정반대의) 자신의 모습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네가 어디갔냐"는 케빈의 직선적인 물음 앞에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는 블랙은, 자신을 닮은 물소리를 배경으로 케빈과 어린 시절의 기억을 재연한다. 여전히 두려움 가득한 눈짓과 손짓으로. 울퉁불퉁한 근육질 몸매를 만들어내는 데 주력한 블랙의 내면은 리틀의 순간에서 좀처럼 나아가지 못했던 것이다. 

2. 언노운 걸

감정을 너무나도 '설명'하고 있어서 지쳐버린 영화.

제목 그대로 'unknown'한 존재 하나로 모든 사람들이 스스로의 일상을 돌아보고 반성하게 되는 커다란 구조는 일단 매력적이다. 후반부까지 이름 하나 제대로 나오지 않는, 없어져도 그만일 수 있는 불확실한 존재가 이렇게 커다란 폭풍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 이런 구조는 일본 추리소설이나 영화에서 종종 볼 수 있는데, 이것이 매력적으로 느껴지려면 독자나 관객이 이 주제를 은연 중에 알도록 하는 게 아닐까 싶다. 설령 의도한 바에 못 다다른다고 하더라도 은밀한 분위기만으로 작품은 충분히 의미가 있었을 텐데, <언노운 걸>은 결국 후반부에 이르러 영화의 결정적인 주제인 '죄책감'이라는 감정을 인물들의 대사로 노골적으로 표현해 버린다. 번역가의 손을 거친 벨기에 영화이기 때문에 번역의 문제인지, 감독이 의도한 대사의 문제인지는 한 번 더 봐야 알겠지만 전체적으로 뒷부분에서 긴장감이 흐트러졌고, 그렇게 되니 루즈한 장면들이 너무나도 의미없게 느껴지면서 결국 엔딩 크레딧이 나오기도 전에 보는 데 흥미를 잃고 말았다. 

3. 에이리언: 커버넌트

내 취향이 뭔지 다시금 느끼게 해주시고요.

리들리 스콧의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다. 물론 그가 영화마다 부여하는 세계관 그리고 큰 그림을 그릴 수 있는 능력에 대해서는 언제나 감탄하게 되지만, 늘 그 이상의 소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존재론적인 의미가 심어진 심오한 주제들이기에 생각할 거리가 많을 법도 한데, 장면 장면에서 느껴지는 경악스러움 때문인지 영화를 보는 와중에 내 생각과 감정을 정리할 틈이 없다. 작은 세계 안에서 인물의 감정에 주력하는 영화(대표적으로는 홍상수 감독의 작품들)를 좋아하는 것은 사실 내 취향이자 약점이 되기도 하는 부분이다. 그만큼 내가 쓰는 글과 내가 만드는 영상, 나의 주된 생각에는 '스펙타클함'이 없다. 하지만 노력해서 바꿀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제는 그러려니.

4. 겟아웃

역설적인 복수가 있었다. 

감독이 보여주는 인종 차별의 이면에는 '흑인을 향한 백인의 부러움'이 있다. 물리적인 힘부터 섬세한 심미안까지, 여러 면에서 흑인 인물들은 백인이 부러워할 만한 우등한 면모를 보이며 이는 곧 백인들의 잔인무도한 행위를 만들어낸다. 백인을 이중으로 비판하고 있는 통쾌한 영화였다. 배우이자 코미디언 출신인 감독 답게 유머 또한 놓치지 않고 있는 매력적인 스릴러물. 더욱이 로즈의 행동이 어머니의 최면으로 인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숨겨진 장면 덕분에, 억지스러움으로 남을 수 있었던 캐릭터 설정이 꽤 탄탄해진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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