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랍어 시간 아름다운

9
어스름


  새벽 어스름 속을 걸어본 적 있니.
  사람의 육체가 얼마나 따뜻하고 연약한 것인지 실감하며 차가운 공기 속으로 발을 내딛는 새벽. 모든 사물의 몸에서 파르스름한 빛이 새어나와, 방금 잠이 씻긴 두 눈 속으로 기적처럼 스며들어오는 새벽.

  키리에크 거리 끝의 아파트 이층에 우리가 살았던 시절, 새벽이면 늘 그렇게 혼자 골목을 걷곤 했어. 공기에서 푸른 기운이 가실 때쯤 집으로 돌아오면 부모님과 넌 아직 잠들어 있었지. 바깥보다 어두운 실내를 밝히려고 나는 갓등을 켜고, 깨끗한 허기를 느끼며 냉장고를 뒤졌어. 몇 알의 호두를 꺼내 우물거리며, 발뒤꿈치를 들고 살금살금 내 방으로 들어가곤 했어.
  이제 그 모든 일들은 나에게 불가능한 것이 되었어. 충분히 밝은 시간, 밝은 장소에서만 뜻대로 움직일 수 있으니까. 다만 상상할 뿐이야. 동틀 무렵 지금 세든 집을 나서서, 차량도 행인도 드문 어둑한 거리를 통과해, 오래전 우리가 살았던 수유리 집에 다다를 때까지 걷고 또 걷는 내 몸을.

  수유리의 우리 집 기억하니.
  방이 네 개나 되는, 당시로선 꽤 넓은 편이었지만 외풍이 심해 겨울을 나기 힘든 빌라였지. 동향이라 더 춥다고 어머니는 불평하시곤 했지만 난 그게 더 좋았어. 새벽에 깨어서 거실로 나오면 모든 가구들이 푸른 헝겊에 싸여 있는 것 같았지. 파르스름한 실들이 쉴 새 없이 뽑아져나와 싸늘한 공기를 그득 채우는 것 같은 광경을, 내복 바람으로 넋 없이 바라보며 서 있곤 했어. 마치 황홀한 환각 같던 그 광경이 약한 시력 때문이었다는 걸 그땐 알지 못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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